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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남천동 비치아파트의 기억 본문
어릴적 나는 바닷가에 살았다. 바다에 뛰어들어 미역을 건져서는 그걸 들고 모래사장을 뛰어다녔다. 백사장엔 조개 껍데기들이 가득해 친구들과 매일 조개 싸움을 했다. 가위바위보를 한 후 이긴 순서대로 상대방의 조개를 반듯하게 두고 내 조개로 내리치는데 한쪽 조개를 부서트리면 이기는 게임이었다. 아파트 단지 안의 놀이터는 바닷가에서 퍼온 모래로 가득했으므로, 굳이 바닷가까지 가지 않아도 조개싸움을 할 조개는 어디에나 널려있었다. 크면 큰대로 작으면 작은대로 재미있었다. 80년대 초중반엔 놀거리가 넉넉하진 않았으니 그것만으로도 시간 가는줄 모르고 놀았다.
남천동은 영화 '범죄와의 전쟁 : 나쁜 놈들 전성시대' 대사에도 나온다. "마! 느그 서장 남천동 살제? 으이?" 부산에서는 나름 부촌으로 유명한데 어렸을 때에는 전혀 그런 줄 모르고 자랐다. 남천동 벚꽃은 그 당시에도 참 이뻤다. 아파트 단지 바깥으론 방파제가 빙 둘러져 있는데 그 방파제들 위를 뛰어다니면서 놀기도 했다. 하루는 너무 괴상한 벌레를 보고 놀라서 발을 헛디디는 바람에 바다로 떨어져 기절했다가 누군가 구해줘서 발가벗은 몸으로 거실에서 정신을 차린 적도 있다. 당시 공문수학 선생님이 놀란 눈으로 날 들여다보던 기억이 흐릿하게 난다.
그때만 해도 광안대교는 없었다. 초등학교 교실 뒤편에는 부산에 생길 수도 있다는 인공섬 이야기가 SF소설같은 느낌으로 붙어있었다. 해운대 가는 길은 뭔가 멀었다. 내 기억으론 그당시 해운대는 별볼일 없었다. 내가 다니던 음악학원 수강생들이 해운대 그랜드호텔이라는 곳에서 발표회를 했는데 최근 다시 가보니 망해버린 채 건물은 남아있어서 놀랐다. 옛날 해운대는 휑한 공터에 놀이공원에 가면 볼 수 있는 범퍼카가 있었던 것 같다. 광안리 해수욕장 역시 황량했다. 내가 다니던 태권도장은 삼익비치아파트 B상가 4층쯤에 있었는데 창문에서 바닷가를 쭉 내려다볼 수 있었다. 바닷가엔 일정 거리마다 공중화장실이 있었는데 지금도 남아있다. 어릴적 태권도장 사범님은 그 창문 밖을 손으로 가리키며 "저기 보이는 세번째 화장실까지 찍고 돌아온다. 선착순!"이라고 외치곤 했다. 그럼 애들은 신나서 뛰어나갔는데 그때 그 학원비가 참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광남초등학교에 다녔다. 요즘 학폭이 이슈인데 당시 초등학교 선생들의 부패는 그 못지않게 심각했다. 초등학교 1학년 당시 나이 많은 여자 선생이 있었는데 걸핏하면 학부모 상담을 하겠다고 불러서는 대놓고 봉투를 요구했다. 초등학교 4학년 1학기까지 마치고 서울로 전학올 때까지 선생 4명 중 3명이 똑같이 그짓거리였다. 특히 그 1학년 선생이 가장 악랄했는데 봉투를 더 잘 받아낼 목적이었는지 선생의 지위를 남용해 부당한 체벌을 일삼았다. 학교 선생들중 봉투를 요구하지 않았던 유일한 사람이 4학년 담임인 선장우 선생님이었다. 좋은 사람 이름만 기억나니 다행일까. 좋은 사람, 나쁜 사람 모두에게 반드시 업보가 돌아갈 것이라 믿는다.
학교에선 팽이싸움과 공기놀이를 많이 했다. 팽이엔 프로야구팀의 이름이 붙어있었는데 쇠팽이같은 상위 레벨도 있었다. 문화적 르네상스 시기여서 변화의 폭이 급격했다. 아이들은 학교 복도에서 잼과 노이즈의 노래를 불렀다. 어느날 중국집에서 1,100원짜리 짜장면을 먹던 나는 TV에서 '서태지와 아이들'이 신승훈을 꺾고 가요프로그램 1위에 오르는 모습을 보며 뭐 저런 이상한 노래가 다있냐고 생각했다. 친구들과 60권짜리 만화삼국지와 드래곤볼을 돌려봤고, 혜성처럼 등장한 닌텐도 게임기로 수퍼마리오 게임을 했고, 컴퓨터로는 페르시아의 왕자 게임을 했다. 초등학교 체육복은 파란색과 흰색 조합이었는데 학교 로고가 그려져있었다. 피구왕통키 덕분에 피구 붐이 일었어서 그 체육복을 입고 피구를 징그럽게 많이 했다.
당시 부산엔 유명온천인 허심청이 있었는데 다양한 탕이 마련돼있어 그야말로 신세계였던 기억이다. 황령산이나 UN묘지에 자주 갔고 가끔 달맞이길에도 갔는데, 우리 가족이 가장 즐겨 찾았던 식당은 언양불고기 집이다. 아주 옛날엔 건물이 엉성했고 천막도 있었던 것 같은데. 최근 가서 먹어보니 불고기와 김치찌개 맛은 그대로여서 감동했다. 그새 원조 논쟁이 있었나본데 자세한 내용은 잘 모르겠고, 나에게 부산언양불고기는 언양불고기 부산집본가(부산 수영구 남천바다로33번길 8) 뿐이다. 언젠가 끝내 삼익비치가 재개발되면 어릴적 10년간 살았던 동네의 모습이 사라질테니 슬플 것 같다. 어차피 유한한 인생. 변하는 것을 슬퍼한다는 게 부질없는 것 같기도 하지만, 먼훗날 노인이 될 내가 어릴적 내가 먹던 것과 같은 불고기와 김치찌개를 먹는다면 큰 위안이 될것 같다.
사실 내가 기억하는 어릴적 부산의 찐맛은 떡볶이다. 어렸을 때 먹던 부산 떡볶이 맛은 어딜가나 거의 다 비슷했다. 큰 가래떡에 꾸덕뚜덕한 빨간 고추장 양념을 잔뜩 묻혀 한입 베어물고, 베어문 곳에 하얀 떡살이 드러나면 다시 양념을 묻혀서 먹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비위생적이지만 그땐 다들 그랬다.) 가래떡을 1개 단위로 팔았는데 떡 하나에 50원이었나 100원이었나 그랬다. 하교길에 삼익비치 A상가까지 가서 먹곤 했는데 그 맛이 너무 그립다. 다리집이나 상국이네 같은 요즘 부산 떡볶이집들의 맛은 그때 그 맛이 아니다. 그나마 비슷한게 서울 연신내 연서시장에 있는 떡산인데 그것도 완전 똑같진 않다. 미스터초밥왕 만화를 보면 어릴적 맛을 똑같이 재현한 음식을 먹고 감격해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나오는데 전혀 과장이 아니다. 내가 죽기 전에 그 맛을 다시 맛볼 수 있다면 기쁨의 눈물이 방울방울~ 맺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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